무언가에 죽도록 매달려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면, 이 애니메이션이 그 질문에 정면으로 답해줄 겁니다. 재즈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는 10대 소년 세 명이 도쿄 최고의 재즈 바 '쏘 블루' 무대를 향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음악 애니 한 편 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틀었다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줄거리: 무작정 도쿄로 온 소년의 이야기
영화는 주인공 미야모토 다이가 혹한 속에서 입술에 피가 맺힐 때까지 색소폰을 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향 센다이를 뒤로한 채 홀로 도쿄로 올라옵니다. 20살도 되기 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로 무작정 뛰어든 거죠. 낮에는 공사장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고, 밤에는 재즈 바를 찾아다니며 연주를 듣는 생활을 반복합니다.
다이는 우연히 같은 또래의 피아노 연주자 사와베를 만나고, 즉흥적으로 밴드 결성을 제안합니다. 사와베는 4살 때부터 재즈를 해온 인물로, 자신의 색소폰 연주를 직접 들어보겠다며 일단 한 발짝 물러섭니다. 그런데 다이의 연주를 듣고 나서 바로 마음을 바꿉니다. 고작 3년 경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의 연주였으니까요.
드러머가 필요했던 두 사람은 다이의 친구 타마다를 끌어들입니다. 타마다는 드럼을 쳐본 적조차 없었지만, 다이의 색소폰 소리에 완전히 빠져들어 드럼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즉흥연주(improvisation)란 정해진 악보 없이 순간의 감정과 아이디어로 연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타마다는 드럼이라는 악기를 통해 그 즉흥성의 세계로 처음 발을 들인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의 밴드 'JASS'가 탄생합니다.
저는 이 도입부에서 다이보다 타마다에게 더 눈이 갔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36개월 할부로 드럼 세트를 사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밤마다 혼자 두드리는 장면이 어딘가 현실적으로 느껴졌거든요. 뭔가를 처음 시작할 때의 그 무모함, 저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결말: 깁스를 찬 손으로 치는 피아노
JASS는 공연을 거듭하며 실력과 인지도를 쌓아가고, 마침내 도쿄 최고의 재즈 바 '쏘 블루' 무대에 서는 기회를 잡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직전,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와베가 덤프트럭 사고로 오른팔이 심하게 손상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죠.
다이는 2인으로라도 공연을 강행합니다. 당일 다이와 타마다는 사와베 없이 무대에 서고, 연주가 끝난 뒤 사와베의 이름을 관객 앞에서 직접 호명합니다. 그때 몰래 병원에서 빠져나온 사와베가 공연장에 나타납니다. 다이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오늘이 JASS의 마지막 날임을 직감하고 눈물을 터뜨립니다.
사와베는 깁스를 찬 채로 피아노 앞에 앉아 왼손만으로 연주를 시작합니다. 그 장면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연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순간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장면이 됩니다. 세 사람은 JASS로서 마지막 연주를 함께 마치고, 영화는 그렇게 끝납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예술 작품을 통해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경험을 뜻합니다. 저는 이 결말에서 정확히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게 이 작품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와베라는 인물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서사는 사와베의 변화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술적으로 뛰어난 연주자입니다. 하지만 쏘 블루의 담당자는 그에게 날카로운 말을 던집니다. "솔로 연주는 내장을 꺼내 보여줄 정도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당신은 늘 같은 음악만 하고 있다"라고요.
솔로 연주(solo performance)란 재즈에서 다른 악기들이 배경으로 물러나고 한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자신만의 선율을 펼치는 순간입니다. 재즈의 꽃이라 불리는 이 순간에 사와베는 감정 없이 손가락 기술만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말을 들은 후 사와베가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하는 과정이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성장 서사라고 느꼈습니다.
재즈의 즉흥성과 감정 표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재즈인코리아 같은 국내 재즈 전문 매체에서도 관련 글을 찾아볼 수 있고, 재즈의 역사와 연주 이론에 대한 학술적인 배경은 케네디 센터 재즈 교육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유형의 캐릭터, 즉 기술은 있는데 마음이 닫혀 있는 인물이 각성하는 서사는 자칫 진부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블루 자이언트는 그 과정을 설명 없이 연주로 보여줍니다. 사와베가 변했다는 말을 대사로 하지 않고, 오직 피아노 소리로만 증명합니다. 그게 이 영화가 영리한 이유입니다.
블루 자이언트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이가 처음 사와베 앞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장면: 경력 3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의 에너지가 폭발합니다.
- 타마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홀로 드럼을 치는 장면: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무모함과 진지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 사와베가 쏘 블루 계열사 공연에서 혼신의 연주를 펼치는 장면: 기술과 감정이 처음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 깁스를 찬 채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치는 마지막 장면: 말이 필요 없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담은 순간입니다.
아쉬운점: 다이와 타마다의 서사가 약합니다
영화가 좋았던 만큼, 아쉬웠던 부분도 솔직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원작 만화의 앞부분을 잘라내고 다이가 도쿄로 온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덕분에 다이가 왜 재즈에 빠지게 됐는지, 어떻게 그 실력을 키웠는지, 그리고 센다이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란 한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경험과 갈등을 통해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다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뜨겁고 순수한 인물로 일관합니다. 물론 그 자체가 매력이지만, 그가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배경이 없으니 감동의 깊이가 살짝 얕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타마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럼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실력을 키워가는 과정이 영화 안에서 꽤 압축적으로 처리됩니다. 저는 그 성장 과정을 더 느리게, 더 구체적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처음 드럼을 잡았을 때의 막막함, 반복 연습의 지루함, 그러다 처음으로 리듬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같은 것들이요. 그런 디테일이 있었다면 타마다라는 인물이 훨씬 더 살아났을 겁니다.
앙상블(ensemble)이란 여러 연주자가 함께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JASS라는 밴드 자체가 앙상블인데, 영화 안에서 사와베의 서사가 워낙 강하다 보니 나머지 두 사람이 그 뒤로 조금 밀려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세 사람 모두 온전히 조명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들인데, 그 점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아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