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영화라고 하면 과장된 와이어 액션에 눈살부터 찌푸려지시는 분, 혹시 계신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보고 나서 그 편견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2000년 개봉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포함해 4개 부문을 수상한 이 작품, 과연 무협 영화가 맞긴 한 걸까요?
절제된 영상미, 무협 영화의 고정관념을 깨다
무협 영화 하면 어떤 장면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벽을 타고 달리고, 손에서 에너지파가 나오고, 중력 따위는 무시하는 화려한 장면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와호장룡은 그 기대를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와호장룡에서 이안 감독이 선택한 연출 방식은 '절제'였습니다. 인물들이 지붕과 나무 위를 가볍게 날아다니는 와이어 액션(wire action), 즉 강철 와이어를 배우 몸에 연결해 공중 동작을 구현하는 기술은 등장하지만, 전반적인 움직임이 정적이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느낀 건 "이게 날아다니는 건데 왜 이렇게 우아하지?"였습니다.
이안 감독은 홍콩 느와르나 쿵푸 영화 특유의 빠르고 폭발적인 편집 대신, 자연 배경과 인물의 감정이 함께 흐르는 흐름을 선택했습니다. 대나무 숲 위를 두 인물이 떠다니는 장면은 실제로 스크린에서 보면 액션 신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수묵화(水墨畵)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무협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거부감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원화평이 만들어낸 액션, 두 여성이 써 내려간 명장면
와호장룡의 무술 장면은 무술감독 원화평(袁和平)이 맡았습니다. 원화평은 '킬 빌', '매트릭스' 시리즈 등에서도 무술 안무를 담당한 인물로, 세계 영화계에서 무술 연출의 권위자로 꼽힙니다. 무술 안무(martial arts choreography)란 단순히 싸우는 동작을 짜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성격과 감정선을 동작으로 표현하는 예술적 작업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양자경이 연기한 수련과 장쯔이가 연기한 소룡의 대결 시퀀스입니다. 특히 수련이 여러 무기를 차례로 바꿔가며 청명검을 든 소룡을 상대하는 장면은 분량이 꽤 길었음에도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연속 대결 장면은 중간에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퀀스는 끝까지 긴장감이 유지되었습니다.
고강도 액션에 일부 대역이 투입됐을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두 배우가 직접 소화한 장면들의 완성도는 감탄스러웠습니다. 와호장룡의 액션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절제된 와이어 액션으로 과장 없이 우아한 움직임을 구현했습니다.
- 원화평의 무술 안무가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동작으로 풀어냈습니다.
- 양자경, 장쯔이 두 배우가 긴 대결 시퀀스를 높은 완성도로 직접 소화했습니다.
- 대나무 숲 장면처럼 자연 배경과 액션이 결합된 시각적 밀도가 높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가 맞물린 결과물이기 때문에, 단순한 오락 액션 영화와는 결이 다른 무게감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IMDb -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영화는 평단과 대중 양쪽에서 높은 평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모백이라는 인물, 그리고 아쉬움이 남는 퇴장
극 중에서 이모백은 무당파(武當派), 즉 중국 무협 세계관 내에서 최고 수준의 내공과 검술을 갖춘 유파 출신의 최강 무사로 묘사됩니다. 그런 인물이 주인공인 만큼 그의 무술을 실컷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주윤발이 연기한 이모백의 실제 무술 장면은 생각보다 훨씬 적습니다. 와호장룡 최고의 명장면으로 자주 언급되는 대나무 숲 시퀀스도 두 인물이 대나무 위를 떠다니는 시각적 아름다움에 집중되어 있고, 정작 이모백이 검술로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내공(內功), 즉 무협 세계관에서 오랜 수련으로 몸 안에 축적된 에너지를 뜻하는 개념인데, 그 내공이 압도적이라는 설명은 여러 번 나오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너무 짧습니다.
이모백의 최후도 제게는 무척 허망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랜 숙적 푸른 여우와의 대결 끝에 독침 한 방에 맥없이 쓰러지는 결말은, 그가 쌓아온 내공으로 독을 억누르거나 최소한 결전다운 결전을 치르고 퇴장하는 장면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2:1 대결 같은 위기 상황에서 그 실력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캐릭터의 무게감이 더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구성이 의도적인 연출일 수도 있습니다. 이모백은 영화 내내 강함보다는 억눌린 감정과 미완의 복수를 짊어진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그의 쓸쓸한 퇴장이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선택이 관객으로서의 만족감을 일부 희생시켰다고 봅니다.
사랑과 자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소룡이라는 인물
액션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사실 와호장룡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은 소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강호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 어릴 적부터 비밀리에 수련해온 무당파 비급(秘笈)의 기술, 그리고 사막에서 만난 소호와의 사랑까지 소룡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것을 욕망하는 인물입니다. 비급이란 특정 문파에서 극비로 전수되는 무공 서적을 가리키는 말로, 그것을 훔쳐 혼자 익혔다는 설정이 소룡의 반항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장쯔이의 연기는 이 복잡한 결을 꽤 잘 살려냈다고 생각합니다. 명문가 규수의 얌전한 모습과 청명검을 손에 쥐었을 때의 거침없는 태도가 한 인물 안에 자연스럽게 공존합니다. 출처: BFI -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에서도 이 영화가 여성 캐릭터의 서사적 깊이를 높이 평가한 이유 중 하나로 소룡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말에서 소룡이 무당산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장면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소원이 무엇인지 영화는 명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소호와 함께하는 삶인지, 강호에서의 자유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인지. 이 열린 결말이 저는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단정 짓지 않는 것 자체가 소룡이라는 인물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와호장룡은 무협 영화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입문작으로 권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액션의 쾌감보다는 인물들의 감정과 영상미에 방점이 찍혀 있고, 이모백의 활약이 기대에 다소 못 미치는 아쉬움이 있더라도 소룡과 수련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습니다. 무협이라는 장르가 낯선 분이라면, 이 영화부터 시작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