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조용한 멜로물인 줄 알았습니다. 60대 노인의 뒤늦은 사랑 이야기라니, 잔잔하겠다 싶었죠.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서야 제가 완전히 낚인 걸 깨달았습니다.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2013년작 '베스트 오퍼'는 아름다움 뒤에 배신을 감춘 영화입니다. 보고 나서도 뭔가 찜찜한 여운이 남는다면, 아마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셨을 겁니다.
영화 배경: 예술과 고독으로 쌓아 올린 한 남자의 세계
주인공 버질 올드먼(제프리 러쉬)은 미술품 감정사(Art Appraiser)입니다. 감정사란 작품의 진위 여부와 역사적 가치를 전문적으로 판단하는 직업으로, 단순히 그림을 좋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안목이 요구됩니다. 올드먼은 그 분야에서 정점에 선 인물이고, 영화는 초반부터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냉정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데 공을 들입니다.
그는 수십 켤레의 장갑을 바꿔 끼며 맨살이 외부에 닿는 것조차 꺼려합니다. 사람도, 사물도 믿지 않는 인물이죠. 그런 그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여성 초상화 컬렉션입니다. 친구 빌리(도날드 서덜랜드)를 경매에 보내 그림을 낙찰받고, 자신만의 비밀 방에 가득 걸어둔 채 홀로 감상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그냥 기이한 취미 정도로 넘겼는데, 나중에 결말을 알고 나서 다시 떠올리니 소름이 돋더라고요.
올드먼의 세계에 균열을 만드는 사람이 바로 클레어 이벳슨입니다. 부모님 유산으로 물려받은 저택의 골동품 경매를 의뢰하는 그녀는, 대인 기피증(Agoraphobia)을 앓는다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대인 기피증이란 타인 혹은 공공장소에 있을 때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심리 증상으로, 일상생활 자체가 어려울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화는 이 설정을 꽤 설득력 있게 쌓아 올립니다. 처음에는 저도 클레어가 정말 아픈 사람이라고 믿었으니까요.
배경 깔리는 방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특유의 미장센(Mise-en-scène), 즉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를 의도적으로 구성하는 연출 방식이 영화 전반에 걸쳐 눈을 압도합니다. 클레어의 저택 내부, 올드먼의 비밀 방, 복원 중인 보캉송 로봇까지 그림 같은 장면이 이어지는데, 여기에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더해지니 비교적 정적인 전개임에도 지루함이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그림에 전혀 조예가 없는 분이라도 등장하는 명화들 앞에서 눈이 저절로 멈추게 될 겁니다.
반전 구조: 복선은 처음부터 깔려 있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반전 자체보다 그 반전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했냐에 있습니다. 후반부까지는 누가 봐도 멜로 드라마입니다. 60년 넘게 혼자 살아온 남자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어릴 적 상처를 가진 여성과 조심스럽게 가까워지는 이야기죠. 거기에 골동품이라는 독특한 배경과 보캉송 로봇 복원이라는 서브플롯이 얹혀 있어서 이야기에 입체감이 생깁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특히 예상 밖이었던 건, 반전이 터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의심이 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복선이 분명히 있었는데도 그냥 흘려보냈거든요. 이게 토르나토레 감독의 솜씨입니다.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전달되는지를 설계하는 방식에 있어서 이 영화는 상당히 계산적입니다. 복선을 복선처럼 보이지 않게 심어두는 것, 이게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글을 쓰는 입장에서도 새삼 느꼈습니다.
결말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이렇습니다. 빌리, 로버트, 클레어 세 사람이 처음부터 짜고 올드먼의 초상화 컬렉션을 통째로 빼돌린 것이었죠. 클레어의 광장 공포증도, 물려받은 저택도 모두 연극이었습니다. 그 집은 카페 종업원 소유였고, 클레어는 멀쩡히 매일 외출을 해온 사람이었습니다. 올드먼이 얻은 건 완성된 보캉송 로봇 하나뿐이었고, 평생 모은 컬렉션과 첫사랑이라 믿었던 감정까지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 영화에서 반전이 효과적인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장르적 기대를 역이용했다. 멜로·드라마로 보이도록 중반까지 완벽하게 유지한다.
- 주인공의 약점을 서사의 도구로 삼았다. 올드먼의 '신뢰하지 않는 성격'이 오히려 그를 더 취약하게 만든다.
- 감정선이 살아있어 배신감이 증폭된다. 클레어가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라 실제로 감정이 생긴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관객도 혼란스럽다.
- 결말이 열려 있다. 체코 카페에서 올드먼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장면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특히 네 번째가 저는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다 잃고도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올드먼을 보면서, 이 남자가 여전히 클레어를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그냥 삶의 어딘가를 기다리는 건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영화 속 감정 이입(Emotional Identification), 즉 관객이 등장인물의 감정과 상황에 동화되는 현상이 이 장면에서 가장 극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BFI Sight & Sound)
클레어 서사: 팜므 파탈로만 끝낸 건 아쉬웠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아쉬웠던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클레어는 분명 이 영화의 핵심 인물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그녀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란 원래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매혹적인 여성 캐릭터를 뜻하는 표현인데, 클레어가 정확히 그 역할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클레어가 왜 이 사기 계획에 합류했는지, 올드먼을 유혹하는 동안 그녀의 내면에서는 어떤 감정이 흘렀는지, 응급실까지 따라온 그 행동은 계획의 일부였는지 아니면 진짜 감정이었는지. 이 질문들 중 어느 것도 영화는 제대로 답해주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경우는 대개 시나리오 단계에서 여성 인물의 서사가 충분히 설계되지 않은 경우입니다.
클레어가 도구가 아니라 입체적인 인물이었다면 이 영화는 단순한 반전 스릴러를 넘어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녀의 감정이 진짜인 순간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디서부터 균열이 생겼는지, 그런 내면의 긴장을 보여줬다면 결말의 무게가 훨씬 달랐을 것 같습니다. 여성 캐릭터의 내면 서사가 결여된 문제는 비단 이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영화 비평 분야에서는 이를 두고 벡델 테스트(Bechdel Test), 즉 여성 캐릭터가 서사에서 얼마나 자율적으로 존재하는지를 점검하는 기준으로 오랫동안 논의해왔습니다. (출처: Bechdel Test Movie List)
물론 올드먼의 고독과 집착, 배신이라는 큰 틀 안에서 클레어가 너무 많은 정보를 드러내면 반전의 힘이 약해지는 딜레마는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클레어의 분량을 조금만 더 늘렸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수동적인 도구로서의 클레어가 아니라, 자신만의 동기와 갈등을 가진 인물로서의 클레어를. 그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였습니다.
그래도 '베스트 오퍼'는 제가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면서도 후반부에 감정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영화가 흔하지 않으니까요. 반전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특히 사전 정보 없이 보시는 걸 권합니다. 다 보고 나서 처음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며 "아, 그게 그거였구나"를 느끼는 그 순간이 이 영화의 진짜 엔딩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