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짜리 영화가 짧게 느껴진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런 경험이 없었습니다. 일본 실사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한 '국보'는 가부키 배우 키쿠오의 일생을 다룬 작품으로, 재일 한국인 감독 이상일이 연출했습니다. 솔직히 가부키라는 소재가 낯설어서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첫 장면부터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가부키와 온나가타, 알고 보면 달라 보입니다
가부키(歌舞伎)란 17세기 초 일본에서 시작된 전통 연극 양식으로, 화려한 의상과 과장된 동작, 독특한 분장이 특징입니다. 처음 가부키를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낯설다 못해 좀 불편하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온나가타(女形)가 그랬습니다. 온나가타란 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전문으로 맡는 남성 배우를 뜻합니다. 하얀 분칠을 하고 여성의 목소리와 몸짓을 흉내 내는 장면은, 한국 정서에 익숙하지 않은 저로서는 처음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온나가타는 단순한 여장 퍼포먼스로 오해받기 쉬운데, 실제로는 수십 년에 걸쳐 몸에 새기는 극도로 정교한 예술 수련의 결과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배치하고 연출하는 개념인데, 이 영화에서 온나가타 장면의 미장센은 그 자체로 하나의 회화 작품에 가까웠습니다. 전통 의상인 기모노의 무늬, 조명의 각도, 배우의 손끝 움직임까지 단 한 컷도 허투루 찍은 장면이 없었습니다.
가부키가 초기에 여성 중심이었다가 풍기 문란 문제로 여성 출연이 금지된 뒤 남성 배우만 출연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알고 나면, 온나가타라는 존재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산물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저도 그 배경을 알고 나서야 키쿠오의 연기에 제대로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키쿠오의 인생, 핏줄 콤플렉스와 나락 사이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게 요약하면 '한 예술가의 성공과 추락과 재기'입니다. 그런데 그 흐름이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키쿠오가 짊어진 콤플렉스가 보는 내내 가슴을 누르기 때문입니다. 야쿠자 가문 출신에 정통 배우 혈통도 아닌 키쿠오는 스승 한지로의 문하에서 슌스케와 함께 성장하며 '토한 콤비'로 불리지만, 항상 마음속에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극 중 키쿠오가 겪는 주요 사건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야쿠자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된 비극적 출발, 그리고 복수 실패
- 한지로의 제자가 된 뒤 스승 대역으로 서는 무대에서 첫 번째 정점을 찍음
- 문신, 야쿠자 출신, 사생아 등 사생활이 폭로되며 메이저 무대에서 완전히 밀려남
- 국보 배우 만키쿠와의 만남을 계기로 재기, 슌스케와 재결합 후 두 번째 정점 도달
- 슌스케의 죽음 이후 홀로 무대에 서며 '국보'로 지정됨
이 흐름이 3시간 안에 펼쳐지는데, 제 경험상 중반부 이후의 전개가 특히 흡입력이 강했습니다. 키쿠오가 시골 노인회관 공연장을 전전하는 장면은 보는 게 민망할 정도로 처절했고, 그 처절함이 이후 재기 장면의 감동을 몇 배로 끌어올렸습니다.
흥행 1위의 이유,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일본에서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실사 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가부키라는 소재가 일본 국내에서도 대중적이지 않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문화청(文化庁)에 따르면 가부키는 2008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예술 형식이지만, 젊은 세대의 가부키 관람 인구는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긴 것은, 가부키를 소재로 쓴 것이 아니라 가부키를 통해 한 인간의 욕망과 상실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촬영과 미장센에 들인 공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보통의 극장 티켓값을 내고 이 정도 시각적 완성도를 경험하는 게 오히려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키쿠오가 분장(化粧, 가부키 배우가 무대 전 얼굴에 하는 과장된 도안 화장)을 하며 떨고 있는 장면, 그리고 만키쿠 앞에서 홀로 춤을 추는 장면은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인물의 내면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분장이란 단순한 화장이 아니라 배우가 무대 위의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의식(儀式)에 가깝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재일 한국인 감독 이상일이 연출했다는 점도 제게는 흥미로운 요소였습니다. 일본 전통 예술의 가장 깊은 곳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서 '혈통이냐, 실력이냐'라는 보편적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아웃사이더의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부분은 저만의 해석일 수 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3시간도 아쉬웠던 이유와 한 가지 아쉬움
이 영화의 초기 편집본이 4시간 30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영화를 다시 떠올리니, 중간중간 스토리에 구멍이 났다는 느낌이 왜 들었는지 납득이 갔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서사 구조의 빈틈은 보통 편집 과정에서 생기는데, 이 영화에서는 두 부분이 특히 아쉬웠습니다.
첫째는 하루에의 이탈입니다. 등에 같은 문신을 새길 정도로 키쿠오를 따르던 하루에가 왜 슌스케와 함께 떠나는지에 대한 감정적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관객으로서 그 선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맥락이 통째로 잘린 느낌이었습니다. 둘째는 키쿠오와 슌스케의 관계 회복입니다. 골이 깊었던 두 사람이 어떻게 다시 무대를 함께 서게 됐는지, 그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만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3시간짜리 영화라면 이 정도 서사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두 부분만큼은 조금 더 보고 싶었습니다.
감독판이 출시된다면 4시간 30분을 온전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영화는 긴 러닝 타임이 오히려 더 있어도 될 것 같은 드문 작품이었습니다. 가부키 공연과 관련된 더 많은 정보는 쇼치쿠 가부키 공식 사이트(松竹株式会社)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국보'는 가부키를 모르는 사람도, 일본 문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충분히 빠져들 수 있는 영화입니다. 핏줄이냐 실력이냐, 무엇이 예술가를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유효하니까요. 3시간짜리 영화가 짧게 느껴질 것이라는 말을 믿기 어렵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그 경험 이후로 이 감독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